4번 글쓰기=>한국전쟁 초기 1951년 군번 없는 군인 *國民방위군*을 아시나요? [2025년 9월28일]
작성자 최고관리자

                  

                   4번 글쓰기=>한국전쟁 초기 1951년 

                군번 없는 군인 *國民防衛軍*을  아시나요?

                               [2025년 9월28일] 



0.국민방위군

1.국민방위군 설치법=>1950년 12월21일 [1951년 3월 30일 종료=> 약 100일간]


2.국민방위군 페지법=>1951년 5월12일


3.국민방위군 설치 이유

 1] 전쟁시에 최초 南北韓의 삼팔선을 기준으로 일정 기간 남한 지역이 북한의 점령 지역이 되면 

    남한의 청장년이 북한의 *의용군*으로 징집 될 것을 우려해서 남한이 정규군 이외로 청장년을

    먼저 징집해서 의용군으로 끌려 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모집된 예비군이 *국민방위군*이다

    당시에 북한 정규군은 약 20만명인데 남한에서 약 60만명 의용군을 동원해서 총알받이로 썼다

    나머지는 탄약운반 식량운반 교량 보수공사 등에 동원되고 전방에 정규군 손실이 생기면

    병력보충용으로 투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북쪽으로 후퇴할 당시 정규군 5만  의용군 5만이었다.

    후퇴하지 못하고 낙오된 빨치산은 약 2만5000명이었다

    북한의 "의용군 나이"는 대략 16세에서 45세로 "국민방위병"보다 나이 폭이 더 많았다


4.국가 전쟁시 국민방위군 선발 기준

  1] 나이=>17세 40세 [5급 판정자=>평시에는 병역 면제자]

  2] 제2국민역과 청년방위대 출신의 장교들 

  3] 제2국민역 출신의 하급장교 및 기간병들

  4] 제2국민역=>2016년11월30일 이후로 병역법 제5조에 의해서 "전시근로역"으로 칭한다

  5] 주로 청년방위대가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일병 "홀치기" 수법이였다


5.국민방위군 규모

  1] 동원인력=>약 50만명

  2] 실제 동원 인원=>약 68만명

  3] 부대 규모=>10개 사단

  4] 1개 사단 병력=>1만명 규모

  5] 전국에 교육대=>52개소

  6] 1개 교육대 수용 병력=>1만명

  7] 사단 지휘관=>육사 장교. 군사영어교관. 대한청년단 간부. 청년방위대 간부.서북청년단 간부

  8] 사령관=>김윤근 준장 [신성모 국방장관의 사위 총살형]

  9] 부사령관=>윤익헌 대령 [씨름꾼 출신,일본군 사병출신, 가장 부패한 장교 총살형


6.군번 없는 "국민방위군"의 집결지까지 죽음의 행진

  1] "서울 창덕궁"에서  약 1만여명이 "부산 구포" 목적지까지 이동한 대표적인 사례다

  2] 국방부는 "양곡지급권"을 보이고서 내무부 산하 시장.군수.경찰의 협조로 급식을 해결하도록 했다

      그러나 馬牌는 통하지 않았다. "군인과 경찰의 알력 싸움"만 커졌다.

  3]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했다. UN군이 작전통제권이 있지만 예외였다

  4] 국민방위군은 유엔군의 저지로 도로망을 이용하기 못하고 산길.샛길을 이용해서 내려갔다

  5] 추훈 혹한기에 국민방위군은 "먹여주고. 입혀주겠지"하고서 홑바지 저고리를 입고 온 사람이 많았다

  6] 2인 1조로 "가마니 1개"가 보급품 전부였다

  7] 많은 사람이 이동하면서 "凍傷. 餓死. 病死. 脫營"으로 죽고 도망갔다 [벼룩과 이가 득실거렸다]

  8] 소규모 지휘관들은 봉급도 없어서 부정부패에 동조하면서 이동했다

  9] 당시에 국민방위군 모습을 "거지 중에 상거지 행세"라고 했다

  10] 심지어 가끔 주민들이 어디 가야고 물으면 "김일성한테 간다 왜 ?" 하고 비웃으며 항거 했다고 한다.


6.국민방위군 희생자 내용

  1] 정부공식 발표 사망자=>약 2000명 이내

  2] 2009년 참여정부 과거사위원회=>약 6만~~8만

  3] 유영익 교수 이승만 대통령 찬양자=>약 9만

 

7.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의 예산횡령 방산비리

  1] 1951년3월29일 =>국회진상조사 위원회 15명   헌병대 협조

  2] 대략 3개월 약 100일간 예산이 209억 830만 이었다

  3] 국민방위군 1인당 평균 하루 418원이다 [양곡.취사.잡비 등]

  4] 횡령금액=>약 72억 8164만 [총 예산의 35%]

  5] 횡령한 금액의 유입과정

     1] 약 1/3=>국회여당동지회 [신정동지회] 70명

     2] 약 1/3=>관련 기관들 무마비용

     3] 약 1/3=>국민방위군 간부 유흥비용

  6] 윤익헌 부사령관 횡령비용 100일간=> 약 3억 탕진

  7] 당시 감사원 1년 예산=>약 3000만원

  8] 국민방위군 간부들 자체의 부정부패여서  일반인 군납비리는 한 명도 없었다.


8.국민방위군 지휘관들의 예산횡령 방산비리 책임과 처벌

  1] 1심 판결=>1951년 5월 6일 [16명 중 형량이 가벼움  심지어 김윤근 사령관 무죄]

  2] 거창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1951년 2월 [약 719명 사망 중에서 어린아이가 359명]

  3] 국방부 장관 경질=>1951년 5월 5일 신성모 국방부장관 해임

  4] 신임 국방부 장관=>1951년 5월 7일 이기붕 국방장관 임명 [민간인 최초이며  안규백 장관 74년 후 두번째]

  5] 이시형 부통령=>1951년 5월 14일 사임

  6] 육군참모총장 경질=>1951년 6월23일 정일권 소장 해임

  7] 신임 육군참모총장 =>1951년 6월 23일 이종찬 임명

  8] 2심 군사고등법원 판결=>1951년 7월 15일

  9] 군사고등법원 재심 판결=>1951년 7월 19일

     1] 이종찬 참모총장은 "국방경비법"을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

        법을 변경해서 "一事不再理原則"을 피해 갔다

     2] 김윤근 윤익헌 등 간부 5명=>총살형

     3] 나머지 중형

     4] 김윤근 윤익헌 등 총살형=>1951년 8월13일 [대구 인근 야산에서 공개처형[신성모 장인이 빼돌린다 소문]


 9.국민방위병 페지=>1951년 5월 12일 [국민방위병 관련 종료]


 0. 군번 없는 국민방위군 교훈

1.국가가 평상시는 병역면제이며 전쟁시 동원되는 신체검사 5급 "전시근로역"의 역사

2.국민방위군 지휘와 감독 부실 그리고 간부들 부정부패

3.국가의 잘못으로 젊은 청장년의 아까운 죽음과 희생

4.전쟁 종료 후 국가유공자에서 대부분 밀려난 군번 없는 국민방위군 [참전유공자 혜택:7909명]

5.전쟁의 소용돌잉 속에서 국방부와 내무부 알력 싸움 [군인과 경찰 역할 등]

6.따라서 이제는 "순직군인. 순직경찰. 순직소방관. 순직공무원 기타 등"

   "부상군인 부산경찰 부상소방관  부상공무원 기타 등"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작성자=>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작성일=>2025년 9월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