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번 글쓰기=>일제강점기 독립군 광복군 활동 [1910년8월29일~~1945년8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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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번 글쓰기=>일제강점기 독립군 광복군 활동

                      [1910년8월29일~~1945년8월14일]

0.독립군 개요

1. 1897년 10월 12일=>대한제국 선포

2. 1904년 2월 6일~1905년 9월 5일=>러일전쟁

3. 1905년 11월 17일=>을사늑약 [을사조약]

4. 1907년 7월 14일=>이준열사 헤이그 자결 [만국평화회의 고종 밀사 참석]

5. 1909년 10월 26일=>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10년 3월 26일 처형]

6. 1910년 8월 29일=>한일합방 [경술국치]

7. 1919년 3월 1일=>삼일운동

8. 1920년 6월 4일~~6월 7일=>봉오동 전투 [홍범도]

  1] 독립군 피해=>전사 4명 부상 2명

  2] 일본군 피해=>전사 157명 부상 300명]

9.1920년 10월21일~~10월 26일=>청산리 전투 [김좌진]

  1] 독립군 피해=>전사 60명  부상 90명

  2] 일본군 피해=>전사1200명

10.1921년 6월 28일=>자유시 참변

  1] 러시아 공산당 적군파

  2] 러시아 군주제 반공산주의 백군파

  3] 일본=>백군파 지원

  4] 고려공산당[상하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수뇌부 권력다툼 피해

  5] 독립군 피해

    1] 사망자 총=>600명 추정

    2] 체포자 총=>917명 추정

11.고려인 강제이주=>스탈린 명령

  1] 시기=>1937년 9월 9일~~10월 9일

  2] 인원=>17만2000명

  3] 열차=>124편

12. 1932년 1월 8일=>이봉창 [일본에서 히로히토 수류탄 투척 실패]

13.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홍구공원 도시락 대장 등 7명 사망]


 

0.한국광복군 개요

1. 설립=>1940년 9월 17일

2. 장소=>중화민국 충칭시 [중화인민공화국 중경]

3. 해산=>1946년 5월 16일

4. 국가=>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부 출범=>1919년 4월 13일]

5. 지휘체계

  1] 김구[통수권자]

  2] 유동열[지휘권자]

  3] 지청천[총사령관]

  4] 김원봉[부사령관]

  5] 이범석[참모장]

  6] 최용덕[총무처장]

6. 병력=>596명 [서훈자] 약 2만 명[1946년]

7. 참전=>중일전쟁. 태평양전쟁

8. 지원국=> 중화민국 외 3개국

  1] 중화민국 [중국국민당 및 중국공산당] 2] 미국  3] 영국  3] 프랑스  4] 소련

9.적대국=> 일본제국.  나치 독일


0.한국광복군 세부활동
1. 
한국 광복군(韓國 光復軍) 또는 줄여서 광복군(光復軍)은 1940년 9월 17일 

   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군사조직이며, 

   현재는 국가보훈부에서 법적으로 공식상 정규군으로 지정하였다. 


2. 1939년 1월 창립된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과 그 밖의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여 1940년 9월 17일 성립전례식을 갖고 결성되었다. 

   광복군을 실질적으로 통솔하였던 사람은 지청천과 그의 참모장인 이범석이었다.

   한국광복군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활동하던 한인 항일 군사조직을 흡수하여 통합하는 데에 

   진력하였다. 1941년 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되었으며,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흡수하였다.

   중국 각지에 징모 분처를 설치하고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기관지 '광복'을 펴내기도 했다


3. 실질적인 지휘권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 지휘를 받았다.


4. 많은 광복군의 반발 끝에 대한민국 1944년 8월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였다. 


5. 이후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함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가 1945년 8월 15일 


6. 광복을 맞이하였으며, 1946년 5월 16일에 해산하였다.


0.광복군 준비 작업

1.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2.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의 2차 국공합작이 이뤄졌고, 

3. 일본제국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장제스는 임정이 무력수단을 갖추는데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4.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조선인들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데다, 

5. 장제스와 김구 개인이 돈독한 관계도 한몫 했다.

6. 1936년에 장제스의 제안으로 임시정부는 중국에 있는 전 조선인 무장세력을 규합하여 

   광복군 조직을 추진하고 있었다.

7. 광복군은 1939년 1월 8일 창립된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 당군(黨軍)을 모태로 하였다. 

8. 이후 기타 독립군 및 지청천, 이범석 등이 이끌고 온 만주 독립군과 연합하였다

9. 1940년 5월 임시정부 측은 중국 국민정부 장제스 총통에게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줄 것을 

   교섭하였고,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승인받았다. 

   광복군의 지휘권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었으나 1944년 8월 임시정부로 

   통수권이 넘겨졌다.


10. 성립전례식과 창군

   1940년 9월 15일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내용이다. 

   

11. 이어서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임정 요인들과 현지 한국 거류민 및 중화민국 국방성에서 

   파견한 군관들이 임석한 가운데 행사가 거행됐다.


12. 창군 당시 광복군의 규모는 약 30여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처음 꾸려졌을 때 광복군은 총사령부만으로 이뤄진 군인 없는 군대였다. 

    초기 광복군은 “1기 임무로 장병을 급속 모집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 

    항일전선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선이 가까운 시안으로 이동해 

    군인 모집에 총력을 기울였다. 


13. 1·2·3지대와 1941년 1월1일 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흡수한 5지대를 합친 4개 지대로 운영됐다.


14. 1942년 1월 충칭 주재 미국대사관의 보고서는 충칭의 한국 거류민은 200명을 넘지 

    못한다고 적고 있다.

15. 그러나 임정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의 대원으로 시작했다 하며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16. 광복군은 중화민국의 지원 하에 활동해야 하는 한계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광복군을 인정하는 대신 1941년 11월 광복군은 중화민국 정부 측으로부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으로 된 조건을 전달받았다. 


17. 준승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은 중화민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만 

    움직일 수 있도록 명시되어 있었다.


18. 이현희는 이 준승은 한국광복군은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일개 보조,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으며, 

    임시정부 자체도 그 지위가 의심스러워지는 등의 미묘한 국면을 제공하였다고 평가하였다. 


19.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화민국 측의 이 준승 명령에 분개하여 임시정부를 

    미국 워싱턴 D.C.로 옮길 것을 계획하고,이승만과 연락을 취하기도 하였다.


20. 그러나 중국 정부가 김구를 설득하면서 임정 천도안은 무산되었다.


21. 한국광복군 준승은 1944년 8월에 폐기되었고, 

    이때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로 이양되었다.


22. 그러나 광복군의 훈련과 유지는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계획과 목표 설정까지도 장개석의 통제 아래 있었다.


23. 1944년 중국 국민당 정권은 한국광복군의 통수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이양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한국광복군 통수권 환수를 놓고 중국 국민당 내에서도 반대하는 

    시각이 나타났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청천과 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이 저지른 

    난폭한 행동들은 특히 상하이에서, 중국인들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조선인들에게도 

    증오감을 사고 있었다. 광복군은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친일파나 '친일 부역자'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정적(政敵)을 처단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 당시 임시정부는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있던 보수 진영에 완전히 경사되어 있었고, 

    공산주의와 소련의 위험에 대해서 소리 높여 비난하고 있었다.


24. 임정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일제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에 파견되어 버마 전역에 투입되었으며, 

    그 뒤 임정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을 통해 미국 국무부에서 파견한 

    도노번 장군에게 OSS 특별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25. 1945년 4월 당시 임시정부 의정원의 문서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총 병력 수는 339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광복군 현세’를 보면, 

    1945년 3월 현재 광복군의 수는 514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 가운데 중국인의 수는 65명으로 이를 뺀 광복군의 실제 인원은 449명이다.

    4월에는 광복군의 OSS 훈련을 승인하였고,

    미국군 중국전구 사령관 웨더마이어 중장을 방문하였다.


26. 김구는 독자적으로라도 한국광복군의 한반도 진주를 추진하였으나,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군사집단에 대한 관할, 감독, 지도권은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는 

    국민당 정권의 경고로 실패하고 만다. 

    대신 김구는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에게 수시로 연락하여 광복군과 미국 육군, 

    공군과의 OSS 합동훈련 계획 진행 상황을 수시로 독촉하였다.


27. 임정은 일제의 항복이 다가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자력으로 국토를 수복하기로 하고, 

    1945년 8월 11일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했다. 


28. 8월 16일 미군 비행기를 통해 그 선발대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받고 회군하였다. 

    이틀 뒤 8월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해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지만 

    일본군의 저항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29. 그 뒤 임정은 오광선을 국내지대장으로 파견해 서울에 한국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를, 

    대전에 한국광복군 경비대 훈련소를 개설했다. 


30. 그러나 일제 패망 후 한국에 진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려 광복군 국내지대를 해체시켰다. 

    

31. 귀국길이 막혀 버린 중국 주재 광복군도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사실상의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32. 광복군은 해방 이후에도 중국에 남아 ‘확군’ 작업에 정진했지만,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1946년 4월30일 광복군 총사령부는 난징에서 해산하고 

    5월 말 이범석 장군의 통솔 아래 귀국했다. 


33. 귀국 대오에 참여한 병력은 500명쯤이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이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1월25일치 기자회견에서 

    “광복군의 총사가 1만”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과장된 것이다.


 

 

작성자=>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작성일=>2026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