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정전기념일이 없다? 6.25 한국전쟁의 불씨는 어디서 부터인가? [2024년7월27일]
작성자 최고관리자



한국전쟁 정전기념일이 없다?  6.25 한국전쟁의 불씨는 어디서 부터인가?

                   [2024년7월27일] 


인류가 벌인 전쟁 중 가장 많은 국가가 연합한 전쟁은 어떤 전쟁일까? 
기네스북은 미국 국무부 자료를 근거로 6.25 한국전쟁에 67개 국가가 참전하거나 지원받은 

세계 전쟁사 중 가장 많은 나라가 개입한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늘이 한국전쟁 정전일 71주년이다. 

한반도에서 3년 1개월간 벌어진 이 전쟁은 인류가 벌인 전쟁 중 네 번째로 피해가 큰 세계전쟁이었다. 

민주 진영 국가가 이 전쟁을 막아냄으로서  공산주의 확산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한국은 통일을 하지 못하고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다시 한번 이 전쟁의 배경을 찾아본다. 

6.25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에 일어났다. 

전쟁의 불씨는 그날로부터 5년 전인 1945년 2월 4일부터 8일간 크림반도에서 열린 얄타 회담에서 비롯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은 당시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에게 일본에 대항하는 참전을 약속받았고, 

이것이  일제 패망 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는 화근이 되었다. 

 

이 회담에서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제압한 미국은 일본 본토 공격에 앞서 스탈린에게 만주에 있는 

약 1백만 일본 관동군을 공격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미국이 만주 내륙까지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그 대가로 외몽골과 일본에 빼앗긴 사할린 남부를 쿠릴 열도 등에 대한 지분을 약속받았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은 만주 뿐만 아니라 한반도까지 진군하여 일본과 싸우겠다고 하자 미국이 이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 박사는 자신의 대학동문과 기독교계를 동원해 소련군의 한반도 진입을 강력히 비판했고 

언론은 이 주장을 보도했다. 이승만 박사는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향해 “저자가 한반도와 태평양을 소련에 팔아먹는 자”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 여론이 비등하자, 미 국무부는 소련군의 진입을 38선을 이북까지로 제한하였다. 

만약 그때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으로 들어왔더라면 6.25 전쟁은 없었겠지만 

김일성 이 통치하는 공산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총 한 방 쏘지 않고 북한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 수십만 명을 시베리아 벌목장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압록강 수풍 발전소에 설치된 독일제 전기 발전기와 금, 은, 곡식을 러시아로 반출하였고 

북한 전역에 신속히 인민위원회 조직을 설치했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부는 러시아 주변 약 40개 국가를 적화시킨 정치군인 집단이었다. 

이들은 평양에 입성하기 한 달 전 레베데프 등 두 명의 장군과 정치국, 정보부 등 K.G.B 지시를 받는 

정치장교들로 구성된 북조선 소비에트 위성 정권 창출 기획단을 구성해 북한에 진주하자 

즉시 직장에서는 직맹, 농부는 농맹 등 소년단, 청년연맹 하다못해 주부까지 여맹  등 모든 단체를 

공산당 정치 통제 아래 가입시키며 신속히 북한 전역에 적색 조직을 설치했다.

이를 주도하는 장교들은 사관학교를 졸업했거나 군사적 지식이 깊은, 진짜 군인이 아닌, 

즉 정치를 하는 '공산당 당원'으로서, 군을 감시하는 직책을 가지고, 장교 대우를 받는 정치꾼이었다. 

이들은 이런 조직이 완성될 즈음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을 입국시켜 안가에서 꼭두각시 훈련을 시켰다. 

김일성은 입국하기 한 달 전 스탈린을 알현하고 한반도를 소련 위성국가로 만들겠다는 맹세를 했다. 

북한 소련 정치 군부는 김일성이 입국 한 달 뒤 10월 평양 공설운동장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알려진 

독립군 김일성 장군으로 등장시킨다.

이때부터 소련 정치 군부는 김일성을 조종해 남한 적화 공작을 개시한다. 

마침 남한 전역에 조직을 둔 남로당 박헌영이 위조지폐를 찍어내다 들켜 북한으로 도망해 오자 

그를 이용해 각종 폭동 획책을 시작한다. 원래 스탈린은 한반도 지도자로 소련에서 유학한 조선공산당을 처음 결성한 

박헌영을 점지했으나 군부에서 김일성을 천거한 것이다. 

박헌영은 띠동갑 애송이 김일성 휘하에 들어 자신이 먼저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조바심에 폭동을 기획하고 

소련군부는 은근히 이 경쟁심을 이용해 폭동을 돕게 된다.

[박헌영은 1900년 5월 28일생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생]

 

광복한지 1년 만인 1946년 9월 1일 노동조합 총파업을 시작으로 남한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남한 전역은 피바람이 부는 폭동지대로 변하기 시작한다. 

9월 1일 남로당 노동조합 총파업에 이어 다음 달 10월 1일 대구 폭동, 제주 4·3 폭동, 여순 군사 반란

김구 평양 연석회담 참가, 초대 국회 프락치 사건, 김삼룡 이주하가 벌인 서울 불바다 폭탄 제조 등 

지면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폭동과 사건의 뒤에는 소련 정치 군부 사주가 있었다.


스탈린은 남한이 폭동으로 적화되기를 기대했으나 1948년8월15일 남한 정부가 세워졌다  

북한 군대가 규격을 갖추자 전면 남침 때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일성을 부추겨 1950년 6월 25일새벽전쟁을 터트리게 된것이다.  


우리 남한에서는 분명히 해방 후 5년간을 전후해서 전쟁의 징후를 포착하지 못했을까?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남한의 정보와 미국의 정보는 몰랐을까? 방관했을까?

 

불행하게도 우리에겐 정전 기념일이 없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만 했을 뿐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불완전한 정전협정이나마 그간 유지됐기에 '한강의 기적'과 선진국 도약이 가능했다. 

외국의 종전 기념일 못지않게 우리로선 더 없이 소중한 날이다.


우리 정부가 외면한 정전협정은 오히려 미국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미국은 2009년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7월 27일을 '한국전 참전군인 정전 기념일'(National Korean War Veterans Armistice Day)로 선포했다. 

이후 미국 대통령은 매년 이날 추념 메시지를 발표하고 연방정부 기관 등은 조기를 게양하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된 이유에선지 이날은 정전의 의미를 담은 기념일로 지정되지 않았다. 

정부 공식 기념일이 1년 365일 중 절반이 넘는 190일이나 되지만 기서 제외됐다.  

 

이러한 역사의 사실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하게 퇴색되어가는 지금 다시 한번 돌이켜보며 정전 71주년를 

즈음하여 그 비극의 서막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우리들의 역사 인식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서  6.25 한국전쟁시 희생된 장병들과 참전용사 그리고 아들과

남편을 잃고서 슬픔과 아픔으로 살아오신 유가족님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글쓴이=>대한민국 순직군인 유족회장 박형방

작성일=>2024년7월27일